오간 구렐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는 삼성종합기술원에서 보낸 시간을 회고하며 삼성그룹의 경직된 조직문화가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2014년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의 진두지휘하에 헬스케어 산업이 진출하려다 결국 포기하게 된 비화도 공개했다.

 

터키계 미국인인 구렐 교수는 하버드 대학과 콜롬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한 PED(Protein Electro Magnetics) 분야 전문가다. 그는 보스턴에서 보낸 레지던트 시절 뇌수술에 참여했고, 프랑스의 중성자 연구기관인 ILL(Institute Laue Langevin)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그는 컴퓨터화학 분야에서 일하기도 했고, 부즈 앨런 해밀턴에서 의료 관련 컨설팅에 종사하기도 했다. 심지어 소설까지 썼던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10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헬스케어 사업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때 스카우트돼 한국에 왔다. 삼성종합기술원에서 삼성의 기술개발 전략과 R&D 관리, 혁신 전략 등에 참여했다. 구렐 교수는 “엄청나게 많은 걸 배울 기회”였다며 “새로 채용된 연구인력을 대상으로 R&D 전략에 대해 강의하고 삼성과 삼성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깊이 있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삼성은 다른 한국 대기업집단과 마찬가지로 규모의 경제와 높은 수준의 생산 능력, 빠른 의사결정, 동기부여가 잘 된 인력을 바탕으로 성장했으나, 혁신적이지는 않았다. 구렐 교수는 “삼성에 입사했을 때 삼성의 비젼은 Fast Follower에서 업계의 리더로의 변신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삼성전자는 초음파 장비 제조업체 매디슨을 인수하는 등 기존 의료 장비 분야를 발전시키는 것 이상의 급진적인 신기술 개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며 이런 삼성의 움직임은 GE나 필립스, 지멘스 등 당대의 다른 의료장비 분야 거대 기업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전했다.

 

충분한 자본과 위협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신생기업이 시장에 새로 진입하면 막대한 이익을 얻 있는 그들의 주력 사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였다.

 

하지만 삼성의 기업 문화는 지나치게 경직적이었다. 구렐 교수는 “모두가 이 회장의 비전이 필수적이라고 이해했지만, 회사는 Fast Follower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런 사고 방식으로 삼성은 데이터 처리 능력이 보다 빠른 반도체 개발이나 반도체 패널의 초박화, 기계장치의 기능 다양화 등 점진적인 혁신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하고 선도기업의 생산 능력을 추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간 지속된 이런 방식은 미래 발전 전략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전략의 핵심은 차별화이고, 차별화는 한국의 도전 과제”라고 구렐 교수는 말했다. “지난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미국인이 효율성으로 무장한 일본을 병적으로 두려워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전략은 차별화가 아니었다. 다른 나라가 뒤따르고, 능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재 삼성은 TV 등 몇 가지 분야에서 소니를 능가하고 있다. 하지만 곧 중국이 따라올 것이다. 한국이 직면한 딜레마다”

 

이 회장의 비전은 전사적으로 삼성 사원 모두에게 스며들지 않았다. 구렐 교수는 “전사적으로 따라야 하고, 선도기업보다 더 잘 추진해야 할 전략이었지만, 삼성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원들에게는 보스의 명령을 따르는 게 전략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 구글의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구글은 규제 등의 장벽 때문에 헬스케어 산업에 진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애플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구렐 교수는 이런 그들의 입장 표명에는 매우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한다.

 

구렐 교수는 “나의 감으로는 그들은 삼성이 자기들을 따라올 것으로 알고 사실상 삼성을 겨냥해 이런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는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이런 입장 표명이 나온 후 삼성은 전략 회의를 열었다. 삼성의 고위 경영진은 이런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곧 삼성도 규제 장벽 등을 언급하며 의료장비 사업에 진출하지 않겠다는 자체적인 결정을 내렸다”

 

구렐 교수는 이 결정으로 “삼성과 한국이 기회를 잃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4년 이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이재용 부회장이 실질적인 삼성의 후계자로 등극했다. 삼성은 다시 점진적인 혁신 전략으로 후퇴했다. 삼성은 제약바이오 사업에 진출했으나 신약 개발이 아닌 위탁생산을 하고 있다. 구렐 교수는 이 부회장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의료장비 사업 진출 포기 후 구렐 교수를 포함한 상당수의 외국인 연구원들이 삼성을 떠났다.

 

그는 서울의 한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에 입사했으나, 이곳에서도 유사한 문제를 발견했다. 그는 “미래지향적인 경영진에 의해 만들어진 멋진 시설이었지만, 새롭고 세계적인 것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며 한국인들은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으나, 집단의식에는 두드러지거나 달라지는 것에 불편해한다고 말했다.

 

이후 한국을 떠나 1년간 전세계 의료장비제조업체 임원들을 대상으로 의학 강의를 한 후 구렐 교수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로 한국에 돌아왔다. 구렐 교수는 내년에 실시될 총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그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이 융합 대학을 지향하고 있지만, 한국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유수의 해외 대학이 갖춰야 할 진정한 융합이나 세계와의 연계에서 부족함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해외 학자들과 공동연구에 나서는 교수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해 세계화를 유도하고, 혁신을 통한 융합을 추진할 계획이다. 기후변화나 식품안전, 휴먼디지털 인터페이스, 만성질환, 노화 등 실질적인 이슈에 대한 연구에 집중한다면 융합과 혁신, 국제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으로 그는 판단하고 있다.  그는 “예를 들어 기후변화 연구센터가 있다고 하면 에너지기술이나 지질학, 지구물리학 전문가가 있어야 하고, 비즈니스나 규제, 외교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인력이 함께 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