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탈퇴를 앞두고 있는 영국의 시선이 아시아로 향하고 있다. 한때 전 세계에 걸친 식민지 개척으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영국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새로운 해군기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가빈 윌리암슨 영국 국방장관은 최근 영국이 수년내 아시아에 새로운 해군 기지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이는 우리 나라에게 2차대전 이후 가장 큰 변화가 될 것이며 우리가 다시 한번 진정한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기 위한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군대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영국 신문 텔레그라프지는 윌리암슨 장관과 가까운 소식통을 인용해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싱가포르나 브루나이가 후보지로 거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브루나이에는 현재 글루카 소총대대가 주둔하는 영국군 군사기지가 있다. 영국군의 브루나이 주둔 비용은 브루나이 국왕이 부담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도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반영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마하티르 모하메드 총리가 통치하고 있어 해군기지 후보지로 적합하지 않다.

 

베트남 호찌민항으로 들어오는 영국 군함 알비온호. 사진: 영국 해군

 

영국이 영연방에 속하지 않는 아시아 국가에 해군 기지를 건설할 가능성은 작다. 다만 장소나 규모와 상관없이 아시아 해군 기지 건설은 영국이 아시아에서 과거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움직임은 집권당인 노동당의 “세계적인 영국(global Britain)”을 건설한다는 구호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데, 유럽과 아시아 지역 모두가 혼란스러운 미묘한 시기에 영국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더욱 이목을 끌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아시아에서는 일대일로 전략을 추진하면서 외교적 지평을 넓혀가고 있는 중국의 공세와 중국의 부상으로 다소 약화된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미국의 대응으로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영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탈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반백 년 전 아시아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영국은 윌리암슨 장관이 언급한 “진정한 글로벌 플레이어”로 다시 부상하기 위해 아시아의 혼란을 틈타 이 지역에 진출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이런 움직임은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남중국해를 둘러싼 분쟁에 보다 깊숙이 개입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확실한 지지자도 있다. 차이잉원 타이완 총통은 최근 “남중국해 항해의 자유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영국의 아시아 해군 기지 건설 계획에 환영의 뜻을 표했다.

 

영국 군함에서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영국 해군 장교. 사진: 페이스북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영국의 해군 기자 건설 계획에 대해 공개적인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팽창주의적 움직임에 반대하고 있는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완 등은 영국의 이런 조치를 반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2016년 열린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보수당은 브렉시트 이행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던 것은 물론, 포스트 브렉시트 시대 영국의 위상 정립에도 소홀했다. 지난 2017년 테레사 메이 총리는 “세계적인 영국”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몇 달 후 보리스 존슨 당시 외무장관은 “영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영국 군대가 수에즈운하 동쪽 지역으로 다시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이 같은 발언은 상투적이거나 브렉시트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기만 전술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지난해 4월 영국은 1971년 이후 처음으로 수에즈 운하 동편인 바레인에 새로운 해군 기지를 건설했고, 올해에는 오만에 새로운 훈련기지를 열 계획이다. 영국은 현재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16개의 해외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영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미국의 아시아 중심전략(Pivot to Asia)이나 러시아의 동방정책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런데도 영국은 군사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관심을 유지해 왔다.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소재 공관을 나서고 있다. 사진:AFP

 

예를 들면 영국은 영연방 국가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호주, 뉴질랜드와의 정례 군사훈련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5개국은 지난 1971년 체결된 안보협력체 FPDA(Five Power Defense Arrangements) 참여국이다. 지난해 9월에는 영국의 군함 한 척이 남중국해에서 펼쳐진 “항행의 자유”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와 과거의 미국 처럼 영국도 이제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7월 취임한 제러미 헌트 외무장관은 영국은 “우리의 가치를 공유하고 자유무역과 법치, 열린 사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지지하는 나라와 세계의 민주주의를 서로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체인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 한국, 베트남은 모두 영국을 중요 교역 상대국으로 여기고 있다. 영국이 EU에서 완전히 탈퇴하면 영국과 아시아의 교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영국 각료들은 지난 2년간 아시아를 방문해 브렉시트 이후 양자 간 경제협력을 추진해 왔다. 일부 국가들과의 FTA 협상이 진행되고 있으나, 공식 협상은 브렉시트 이행 이후에나 가능하다. 헌트 외무장관의 최근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방문도 브렉시트 이후 교역에 대한 논의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아시아 군사 기지 구축은 군사적인 목적뿐 아니라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아시아와의 경제 관계도 고려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하사나 볼카이 브루나이 국왕이 그루카 용병 창설 200주년 기념 행진을 참관하고 있다. 사진: A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