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내 불법체류 중국인 노동자 수가 크게 늘면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친중국 행보에 대한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최근 실시된 국정조사 결과, 관광객으로 위장해 필리핀에 입국한 뒤 불법체류 중인 중국인 노동자 수가 11만 9,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일부 언론은 이 숫자가 40만 명에 달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가뜩이나 실업자가 많고 수백만 명의 숙련된 필리핀 노동자들이 위험하고 힘든 해외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조사 결과는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현재 1,000만 명이 넘는 필리핀 노동자가 해외로 나가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작년 기준 그들은 180억 달러(20조 원)가 넘는 돈을 본국으로 송금했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1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하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 고위 관리들은 특히 중국 기업이 주로 관리하고 투자하는 카지노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일할 필리핀 근로자가 부족하다며, 국정조사 결과의 의미를 무시하려고 애써왔다. 국정조사가 정치적 색채를 띠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다른 한편으론 중국이 초대형 프로젝트에 자금 지원을 해주고 있고, 심지어 중국의 건설/엔지니어링 기업들이 주도하는 필리핀 정부의 ‘빌드, 빌드, 빌드’(Build, Build, Build) 인프라 프로그램에 전문 기술을 가진 중국인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지난해 필리핀 연방수사국(NBI)이 체포한 게임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불법 중국인 노동자들. (사진: 페이스북)

 

살바도르 패널로 대통령 대변인은 1월 말 기자회견에서 “우리에겐 건설 인부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중국인 노동자 채용이 늘어난 것 같다”며 “필리핀에 실업자가 많지만 기술이 부족한 탓에 우리는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테디 록신 필리핀 외무장관도 이번 달 4일 트위터를 통해 “중국인들은 엄격히 관리되기 때문에 필리핀에서 일자리를 빼앗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한편, 중국인 노동자 유입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23일 “중국인들을 필리핀에서 일하게 하자. 중국에서도 30만 명의 필리핀 국민이 머물고 있는 이상 중국인들에게 ‘이 나라를 떠나라. 우리는 당신을 추방할 것이다’고 말할 수 없다. 중국 당국의 보복으로 우리 국민도 중국을 떠나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고 반문했다.

여러 조사 결과를 보면 필리핀 국민들 사이에 반중국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여론조사 기관인 사회기상국(Social Weather Stations)이 최근 실시해 내놓은 순신뢰 등급 조사((net trust rating)에 따르면 중국은 -16으로 전체 조사 대상 국가 중 최저 등급을 보였다. 미국과 일본은 각각 +59와 +28이었다.

야당 내 비판 세력과 별도로 두테르테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들마저 반중국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유가 이런 국민의 반중국 정서 때문인지도 모른다.

2016년 10월 20일 베이징에서 열린 투자 조인식 직후 두테르테 대통령(좌)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악수하고 있는 모습. (사진: AFP)

 

야당 실세이자 사업가인 프랜시스 팡알리난 상원의원은 정부에게 모든 불법체류 중국인 노동자를 추방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25일 발표한 성명에서 “필리핀에서 불법적으로 일하는 중국인 노동자 수가 수십 만 명에 달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중국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며 “불법체류 중국인 노동자를 특별 대우해준다면 일자리가 없는 수백 만 국민이 느낄 분노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핑 국가주석의 필리핀 방문에 맞춰 2018년 11월 21일 마닐라 중국 영사관 앞에서 열린 집회 참석자들이 시 주석을 희화화한 그림이 그려진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사진: AFP)

 

중국인 노동자 불법체류 문제는 분명 정치적 ‘뇌관’으로 부상할 수 있다. 2월 초, 디자인 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인 한 중국인 여대생이 폭탄테러 위협 때문에 마닐라 지하철에선 액체 반입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경찰관을 향해 ‘타호’라는 두유 푸딩을 던지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히자 전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관련 소식이 사진과 함께 소셜미디어를 타고 확산되자 네티즌들은 “무례한 중국인을 당장 추방하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을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은 “중국인 여대생의 행위가 필리핀에 대한 모욕”이라며 두테르테 정부가 모역 행위를 일삼는 모든 중국인들에 대해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로브레도 부통령은 “이번 사건은 필리핀 경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무시”라며 “두테르테 정부가 중국인들을 ‘특별대우’해줘서 생긴 결과다”라고 비난했다.

필리핀 중산층 사이에선 중국인 노동자와 온라인 게임 회사들이 높은 가격에 필리핀 고급 부동산을 구입하면서 주요 도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한 데 대한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마닐라의 주요 상업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이 늘어나자 일각에선 “필리핀이 사실상 중국의 식민지화가 되고 있다”며 필리핀 국민을 자극하는 발언도 나오고 있다.

필리핀 최대 신문인 ‘필리핀 데일리 인콰이어’(Philippine Daily Inquirer)지는 “난 중국에 온 줄 알았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중국인 노동자들의 필리핀 유입은 국내 고용시장 상황을 악화시켰고, 아파트 임대료도 상승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사설은 또 필리핀 정부가 현재 체류 중인 중국인 노동자 숫자나 체류 현황 및 하는 일 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정부의 ‘친중국 정책’을 비난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집권 이후 대미 의존도를 줄이면서 친중국 정책을 펼치고 있다. 취임 직후 중국을 방문해 총 150억 달러 규모의 필리핀 인프라 프로젝트 투자를 이끌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