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텍사스주 엘파소에서 발생한 22명의 목숨을 앗아간 극단주의자의 총기 난사 사건은 미국인이 필리핀에서 운영하는 다크웹(dark web)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사건의 용의자인 백인 우월주의자 테러리스트 패트릭 크루시어스는 인기 있는 극우 웹사이트 ‘에잇챈(8 Chan)’에 특정 인종에 대한 혐오가 담긴 선언문을 게시했다. 그는 “히스패닉의 텍사스 침략”에 대해 경고하는 한편, 같은 생각을 하는 “형제들”에게 이 게시물을 널리 퍼뜨리라고 독려했다.

이 사이트에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발생한 이슬람 사원 총격 사건과 관련된 게시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총격 사건으로 이슬람교도 51명이 사망하고 49명이 다쳤다.

이런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예고하고 인종주의적 주장을 펴는 통로로 이용한 ‘에잇챈’ 등 필리핀에 기반을 둔 다크웹에 관한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인터넷 지하세계’로 불리는 다크웹은 일반적인 인터넷 브라우저로 접속할 수 없는 암호화된 인터넷망이다. 마약과 불법 동영상, 개인 신용카드 정보, 위조지폐 등이 거래되는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패트릭 크루시어스(21)로 확인된 총기 소지자의 CCTV 영상. 그는 2019년 8월 3일 미국 텍사스주 엘파소의 월마트에서 22명을 살해했다. (사진 : KTSM 9 뉴스채널을 통한 AFP 포럼)

 

필리핀 사법당국은 엘파소 총기 난사 사건을 계기로 극우성향의 웹사이트를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불법 거래뿐 아니라 증오 발언을 온라인에 퍼뜨리는 다크웹의 허브로 부상한 필리핀에서 사법당국의 조사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필리핀 사법당국에 따르면 마약 거래와 성매매, 가짜 신분증, 심지어 폭발물 판매에 연루된 범죄조직들이 모두 필리핀에 기반을 둔 다크웹에서 활동하고 있다.

필리핀 요원들은 다크웹 상의 마약 거래를 차단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 당국자들과 협력하고 있다. 그러나 다크웹에서의 불법 행위 근절이나 증오 발언과 거짓 정보의 확산을 막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이 투입됐는지 분명치 않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통치하에서 온라인 증오 발언은 필리핀에서 일상이 됐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반대 진영에 대해 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종종 죽음이나 성폭력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필리핀의 현실이 ‘에잇챈’의 성격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악명 높은 이 웹사이트는 신나치주의자들과 전 세계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선호하는 플랫폼으로, 뉴욕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프레드릭 브레넌이 2013년에 설립됐다.

그는 당시 극우파들이 애용하던 웹사이트 ‘포챈(4chan)의 대안으로 이 플랫폼을 구축했다, ’포챈‘은 2014년 운영자인 크리스토퍼 폴이 선동적이고 극단주의적인 발언에 엄격한 제재를 가하자 많은 가입자를 잃었다.

‘에엣챈’의 설립자 프레드릭 브레넌과 그의 애완견 (사진: 트위터)

 

브레넌은 자신의 웹사이트를 “표현의 자유 친화적인 포챈의 대안“이라고 홍보해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하지만 그는 자금난을 겪으면서 투자자를 찾아야 했고 2018년 말 그는 필리핀에 기반을 둔 전역 미군이자 필리핀에서 테크 분야 사업을 하는 짐 왓킨스와 동업을 시작했다.

이후 두 사람은 마닐라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고 이 웹사이트가 극우적인 플랫폼으로 급부상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브레넌과 왓킨스는 결국 웹사이트 운영에 대한 의견 차이로 결별했다. 엘파소 총기 난사 사건 발생 후 브레넌은 ’에잇챈‘의 폐쇄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레넌은 이달 4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엘파소 총격범의 선언문은 의심의 여지 없이 범인의 글이고 의심의 여지 없이 에잇챈에 처음 게시됐다”고 말했다. ’에잇챈‘이 증오 범죄를 조장하는 사이트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에잇챈‘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왓킨스는 ’에잇챈‘이 표현의 자유를 위한 필수적인 공간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장문의 성명을 통해 “우리는 법 집행을 돕는다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며 “이 두 번의 비극이 발생한 후 몇 분 안에 우리는 FBI 요원과 함께 그들의 수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협력하고 있었다”고 장문의 성명을 통해 밝혔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일부 언론인들의 비난과 달리 우리는 불법적인 발언을 보호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총기 난사 사건 직후 인터넷 중개업자들은 웹사이트에 대한 서비스를 거부했고 필리핀 당국은 이 사이트와 관리자들을 조사하고 있다.

‘에잇챈’ 공동 투자자인 전역 미군 짐 왓킨스 (사진: 페이스북)

 

메나르도 구에바라 필리핀 법무장관은 7일 ’에잇챈‘에 대한 조사가 법무부 산하 국가수사국이나설만한 사안인지 결정하기 전에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이민당국에 따르면, 2017년 7월 1일에 마지막으로 입국한 브레넌은 비자를 발급받아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다. 왓킨스도 필리핀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민국은 아직 그의 소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들 외에도 논란이 될만한 극우 인사들이 필리핀을 찾고 있다. 일부는 심지어 환대를 받고 있다.

세계 최대 신나치주의 웹사이트 더 데일리 스토머의 발행인 앤드류 앙린도 일정 기간 필리핀 다바오시에 본사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두테르테 대통령을 만나 논란이 된 두테르테의 마약 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분석가들은 극우 인사들이 필리핀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를 동남아시아 국가가 전 세계 다크웹의 허브로 부상하는 흐름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의 케이티 하바스 공공정책 담당 이사는 지난해 “필리핀은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기화된 ‘최초의 지역(patient zero)’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하바스 이사는 “(두테르테의 대선 승리) 한 달 뒤 브렉시트(Brexit) 소식이 전해졌고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기 때문에 두테르테 당선이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나다니엘 글리셔 페이스북 사이버보안정책실장은 페이스북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리셔 실장은 버즈피드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가짜 계정, 스팸, 다른 형태의 어뷰징을 잡아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자동화 도구와 전문 조사원”을 활용하고 있다“며 페이스북이 “올해 필리핀에서 두 건의 작전을 중단시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필리핀의 댓글부대가 자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고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의 선거 개입 여부에 대한 미국 상원의 조사 활동에 참여했던 기술전문가 카밀 프랑수아는 ”필리핀은 (미국이 가고 있는) 이런 흐름을 보여준다”고 경고했다.

그는 필리핀에 기반을 둔 댓글부대와 역정보 전술이 곧 전 세계적으로 복제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